# 반추할 때마다 서로 다른 기억을 곱씹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작품을 접할 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고 다소나마 연륜이 쌓인 후에 당시를 되돌아보며 '그게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까...' 하고 여러 가지로 해석해보는 것은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글쓴이에게 애니메이션에 한정해서 이런 작품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당장 세 작품이 떠오른다. <소녀혁명 우테나>, <퍼펙트 블루>, <신세기 에반게리온>... 특히 이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서로 다른 장면, 서로 다른 갈등관계를 지시한다. 배경음으로 'Both of you, dance like you want to win!'이 흐르며 유니존으로 호흡을 맞춘 신지와 아스카가 사도를 떡실신시키는-_-;; 장면에서 미사토와 신지의 '어른의 키스'에 이르기까지 에바를 처음 접했던 2002년 이후 지금까지 숱한 장면들을 떠올려왔다. 그랬기에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도 이미 완결이 났다는 것을 납득하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숱한 뇌내 보완-_-;;을 멈추지 않았기에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에바 팬' 이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破>을 관람하고 정오께 극장을 나서면서 든 생각은 '황당하네?' 였다. 분명히 친숙한 캐릭터들이 귀에 익은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한 서사는 전혀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뒤이어 미묘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했다. 소싯적에 나 자신을 제멋대로 투영시키고 진실에 도달할 수 있기를, 행복을 붙잡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던 캐릭터들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 다만 사소한 불평을 하나만 꼽자면 이야기의 밀도가 그리 충실하지 않고 짜임새도 얼기설기한 느낌이 들었다. 1시간 50분 동안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려다보니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분명 있었고 또 그런대로 균형 잡힌 서사 재구축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서사 자체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개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나 캐릭터나 에반게리온 등의 설정이 대폭 변화한 것을 두고 이번 극장판이 말 그대로 기존의 <에반게리온>을 '깨뜨려(破)'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정작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기존의 <에반게리온>이 부서져 버렸다고 느낀 지점은 예전만큼의 깊이를 갖추지 못한 드라마와 충분한 개연성을 배경으로 갖지 못한 인물들의 행동이 반복되는 순간들이었다.
#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기본적으로 로봇물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번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破>는 최고의 종합선물세트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글쓴이처럼 이 작품을 기본적으로 한 편의 잘 짜인 심리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번 극장판은 글쎄... 전적으로 괜찮다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너무 박한 평가를 주기도 뭐한, 그런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P.S 1
이번 극장판은 그야말로 떡밥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데 그리 궁금하지도, 그다지 흥미가 가지도 않는다. 과거에 <에반게리온>을 볼 때도 설정들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이번 극장판을 볼 때는 설정에 대한 무신경이 최대한도로 증폭된 듯하다.
P.S 2
그나저나 예고편 말미에 등장한 셰르파 Ver 사령관/부사령관과 캡틴 하록 Ver '그분'의 모습은 참... 웃기기도 했지만 이 작품이 점점 내가 아는 '바로 그' <에반게리온>에서 멀어져 간다는 생각에 순간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